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 드골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자유 프랑스]] 수반 === || [[파일:external/kacew.files.wordpress.com/karsh_de-gaulle.jpg|width=100%]] || [[파일:De_Gaulle-OWI.jpg|width=100%]] ||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약식으로 [[준장]]으로 진급한 드골은 '''편성시작 단계'''의 제4기갑사단을 지휘해 분투했다. 대표적 활약상으로는 [[아라스 전차전]]이 있다. 드골의 제4기갑사단은 종심 깊숙이 진격하느라 측방이 위험해진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제19기갑군단의 후방으로 기동했고, 구데리안의 사령부에서 '''2km''' 앞까지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19군단 군수참모 요한 폰 킬만스에크 육군대위의 대처[* 후퇴 병력들을 재편성하고, 공병들에게 대전차 지뢰를 설치하게 했으며, 가용 가능한 대전차포와 전차 몇 대를 긴급 배치했다.]로 드골의 공세는 좌절된다. 훗날 [[독일 연방군]]의 육군 대장겸 [[NATO]] 중부유럽군 사령관이 된 킬만스에크 장군은 당시 드골의 공세를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벽한 역습."이라 극찬했다.[* 기갑사단의 역습을 일개 대위가 임시로 긁어모은 부대로 좌절시킨 것을 보고 드골의 공세가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프랑스군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은 공군을 후방에 아껴두고 있었고 육군과 공군의 연계도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많은 부대의 동시다발적 공격이 아닌 드골 부대 단독의 역습이라면, 독일군은 소수의 부대라도 동원해서 지연시키면서 공군을 불러 폭격하는 방식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게다가, 프로이센 시절부터 참모의 권한이 강하던 독일 육군 특성상 대위 계급이라 해도 군단 참모라는 직책이면 급할 경우 군단장 명의로 명령문을 선발송하고 사후 승인받는 것도 가능했으니, 이는 사실상 일개 대위가 아닌 군단이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1940년 6월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이에 드골은 불복하여 몇몇 동지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 이후 [[에밀 뮈즐리에]] [[제독]] 등이 합류하여 망명 정부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자유 프랑스 조직 이전에 프랑스 제3 공화정의 내무부 장관이었던 조르주 망델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모로코에서 망명 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모로코 통감인 샤를 누게 대장이 그들을 체포하여 나치 독일에 넘겨버렸다.] 하지만 1940년 프랑스군 주력은 페탱이 이끄는 [[비시 정부]]에게 장악되었었고, 식민지 역시 다수가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실질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오로지 [[윈스턴 처칠]]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만이 자유 프랑스를 지원했을 뿐이다. 게다가 1941년 처칠의 지원으로 드골이 주도한 다카르 상륙작전의 실패와 전황 악화로 인해 드골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고, 여기에 드골 특유의 오만한 성격 탓에 같은 연합국 지도자들인 처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전쟁 내내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는 드골과 영, 미 연합국 지도자들의 관점차에서 기원한 문제로, 드골은 프랑스가 독일의 전쟁의 부역자로 취급받아 군정이 실시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나마 처칠과는 상호 존중 관계였지만, 루스벨트의 경우에는 1945년까지 드골을 프랑스 지도자로 인정하길 꺼리다 마지못해 드골을 [[워싱턴 D.C.]]에 초청하며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루스벨트는 전후 드골이 독재자가 될 것이라 의심했다. ~~참고로 루스벨트는 워싱턴 이후로 내려오던 2선 관례를 깨고 4선이나 해먹었다~~ 물론 루즈벨트는 전례가 없던 세계 대전이라는 참사를 맞아 다수 미국인들의 투표를 통한 동의 하에 4선을 한 것이기 때문에 독재자와는 관계가 없으며 지금까지 이를 문제삼는 미국인도 없다. 그냥 농담으로만 받아들이자.] 1942년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프랑스군의 영웅이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민간, 군사분야 총사령관인 앙리 지로 장군을 드골과 동석시켜 지로를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옹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런 미국측의 뻔한 드골 견제로 인한 반감과 지로의 정치능력 부재로 인해 지로는 드골에게 밀려났다. 거기다 프랑스령 북서아프리카의 최고 선임자였던 해군 원수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 암살[* 이로 인해 다를랑 제독 암살 배후에 드골이 있다는 음모론이 당대에 유행했다.]되어 더 이상 자유 프랑스에 드골을 대체할 만한 인물은 없었고, 1943년 이후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차례로 드골의 자유 프랑스 지지로 선회하면서 드골의 입지는 확고해져갔다. 그리고 1943년 6월 드골은 [[프랑스령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CFLN)를 출범시켜 [[자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공식적으로 편입시켰다. || [[파일:external/media-3.web.britannica.com/48153-004-3BFC5561.jpg|width=100%]] || || 파리를 행진하는[* 사진상으로 보면 키가 워낙 크다 보니 딱히 누구라고 찍어 말하지 않아도 드골을 찾아낼 정도다. 혼자만 키가 엄청 큰 사람이 드골이다.] 드골과 조르주 비도,[*좌측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 사후 레지스트랑스를 이끌었다. 전후 여타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유지에 강경한 입장을 펼쳤고, 결국 정계에서 퇴출되었다. 드골과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이를 소재로 [[자칼의 날]]에서 드골과 대립하고 암살을 사주하는 비밀군사조직 OAS의 창설자로 등장한다.] [[필리프 르클레르]][*우측 자유 프랑스 육군 제2기갑사단장으로 복무했으며, 파리 해방의 최선봉으로 나섰다. 드골과 유사 사제 관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 >'''"파리는 상처받았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 >-파리 해방 후의 연설에서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파리(프랑스)|파리]] 해방이 목전으로 다가오자 전후 프랑스 주도권을 위해 미군, 비 드골계 우익 레지스탕스, 공산당과 파리 해방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결국 드골의 자유 프랑스 육군 2개 사단이 파리 내의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파리를 해방시키고, 드골과 자유 프랑스군이 수십만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개선 행진을 하며 '''해방자 드골'''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당시 파리 해방에 대한 표현 중 하나가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드골은 프랑스 전체를 손에 쥐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프랑스의 통치자로 다른 연합국에게 인정받고 평생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이 과정을 그린 영화가 1966년 르네 클레망이 감독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당시 히틀러는 연합군이 진격해 오자 파리를 완벽하게 파괴해서 잿더미만을 남겨주고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파리 해방을 두고 경쟁하던 자유 프랑스군, 미군, 좌익 레지스탕스 등 여러 그룹이 "조용히 항복하면 독일군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면서 밀사를 파견해오자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1894 - 1966) 중장은 명령을 받고도 차일피일 계속 미루다가, 파리 외곽까지 도달한 자유 프랑스군에 항복한다. 이 순간까지도 히틀러는 계속 독일군 사령관한테 파리를 불태우라고 닥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Is Paris Burning?). 뭔가 병림픽스러운 이야기지만 실화이다.] 이렇게 써놓으면 드골이 다된 밥에 숟가락 올리려고 달려든 기회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는 좀 더 깊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미국은 원래 자유 프랑스를 제대로 된 연합국의 일원으로 보지 않아서[* 사실 2차대전 내내 주류는 비시 프랑스였다. 하지만 자유 프랑스도 나름 할 만큼 해서 북아프리카의 주요 식민지는 나중에 가면 대부분 자유 프랑스로 넘어오긴 했다.] 얄타 회담을 비롯한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한 중요 회담에서 결국 프랑스를 제외했다. 그러나 이 사건 덕분에 마지막에는 프랑스 정국을 장악한 드골을 인정하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프랑스 전체를 위해서도 자유 프랑스가 파리를 선점한 것은 득이 된 셈이다.[* [[김구]]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미 OSS와 공조하여서 [[서울 진공 작전#s-2|서울진공작전]]을 펼치려고 했던 것도 비슷한 의도이기 때문이다. 비록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인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만약 성공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 후에도 미군과 소련군에게 정식으로 인정받았을 것이고 지금의 남북한 대치 상태는 없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김구는 생각했을 것이다] 1945년 11월 제헌의회에 의해 내각 수반으로 임명된 드골은 대(對)독일 저항운동의 주역이었던 [[프랑스 공산당]](PCF)을 내각에서 제외[*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의 70%가 프랑스 공산당 지하조직이었다.]하고 우파만의 정부를 세웠으나,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는 좌파와 중도파[* [[1945년 프랑스 제헌의회 선거|1945년]]과 [[1946년 프랑스 제헌의회 선거|1946년]]의 두차례 총선결과를 보면 급진당(중도파)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현 프랑스 사회당의 전신)를 제하면, 드골파는 과반수는커녕 개헌저지선을 넘기지조차 못했고 나머지 우파를 합해도 의석의 40%를 넘기지 못했다.]를 권력에서 배제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으며, 1946년 6월 [[1946년 프랑스 제헌의회 선거|제헌의회 총선]]에서 중도 우파 정당인 대중공화운동이[* 대중공화운동이 드골과 정치적 입장이 비슷하고 서로 연대하기는 했으나, 대중공화운동은 공산당, 사회당과 함께 내각제를 지지한 3당 체제의 일원이었고, 드골은 대통령제를 지지해 결국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드골의 정당이라 불릴만한 정당은 [[조르주 클레망소]] 전 총리의 아들 [[https://fr.m.wikipedia.org/wiki/Michel_Clemenceau|미셸 클레망소]]가 이끄는 [[https://fr.m.wikipedia.org/wiki/Parti_r%C3%A9publicain_de_la_libert%C3%A9|자유공화당]]이었다.] 원내 제1당에 등극하긴 했지만 개헌저지선조차 넘기지 못한 상태였고 결국 다시 치러진 1946년 11월 [[1946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총선]]에서 공산당이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서면서 그해 말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